20일 창작관에서 우전과 다음 날 영월 주천을 다녀오기로 얘기가 됐다.

12시가 넘어서 우솔한테 전화를 해 내일 간다고 알렸다.

 

오전 9시 반 조금 넘어서 춘천을 출발, 중앙고속도로를 탔고 원주지나 신림에서

국도로 내려왔다. 황둔찐빵마을에 들려 모듬찐빵 한상자를 구입, 우솔네 주었다.

우솔인 집이 아니라 김종길고택인 조견당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구택인 ㄱ자 집과

새로 복원한 한옥이 신,구의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새집 대청마루에 앉으니 폭염도

맥을 못추고 시원했다. 냉차 대접을 관리하는 여자분한테 받았다. 당주는 직장 때문에

서울에서 생활하고 가끔 내려온다고 한다. 춘천서 주천까지 오는데 2시간이 채 안걸렸다.

 

주천은 초행이다. 영월은 오래 전 한번 늦은 시간에 가서 장릉도 바깥에서 잠깐 봤고

청령포도 강 건너에서 바라보고 온 것이 전부다. 영월과 철원, 두 곳에 가장 발걸음이

안 닿았다. 철원도 남 볼일 보는 길 따라 갔다가 삼부연폭포를 보고 온 게 전부다.

 

고택에서 차로 5분 정도 거리에 있는 묵밥집으로 가 메밀묵밥으로 점심을 먹었다.

담배가 떨어져 구입할 수 있을까 싶었는데 단종된다던 장미담배를 우솔이가 두 보루나

사줬다. 우전한테 들은 바로는 농촌에만 앞으로 2년간 더 공급이 된다고 한단다.

 

곧바로 요선정으로 향했다. 주천에서 15분 정도 걸린듯 하다. 장군바위가 펼쳐진 강변이

인상깊었다. 아직은 휴가철이 아니어서 인적이 없다. 사람으로 뒤덮인다고 했다.

미륵암 마당에 주차를 하고 아래로 내려가 요선암[邀僊岩]부터 둘러봤다. 수마[水磨]로 부드러운

굴곡을 이른 바위군이 영국조각가 헨리 무어의 작품같이 보인다. 욕탕같이 움푹 파인 웅덩이가

크고 작으며 여러 모양으로 많았다. 신선이나 선녀가 내려와 목욕을 했을 법 하다.

그래선지 요선암 이전에는 선녀바위로 불리기도 한 모양이다. 훨훨 벗어부치고 들어앉고

싶어지는 욕구를 눌러야 했다. 햇볕은 따가웠지만 바람이 시원해 견딜만 하다.

 

미륵암 뒤로 요선정 올라가는 길이 있었다. 입구엔 막돌을 모아서 쌓은 돌탑 3개가

정겹다. 오솔길로 들어서자 바람은 그늘과 더불어 더욱 시원해 완만한 경사와 더불어

걷기에 무리가 없었다. 천천히 걸어도 10분이면 요선정에 닿는 거리다.

 

요선정[邀僊亭]은 조선시대 4대 명필 중 한분인 양사언이 와 보고 지은 이름이라 한다.

3면이 절벽으로 이뤄지고 훍 한줌 없는 암반에 난 고송이 멋들어진 모습을 보여주며

절벽 아래로는 주천강이 그림처럼 흐른다. 정자가 유난히 작다. 그럼에도 자연과 천연스레

잘 조화를 이룬다. 고려시대에 조성한 것으로 알려진 마애여래좌상이 큼직한 뜬바위에

부조되어 있다. 얼굴과 그 아래는 빗물이 안 미쳐 일자로 하얗다. 언듯보면 좌불이 아니고

입불로 알기 쉽다. 두상과 몸체의 비례가 안맞고 입체성이 강한 얼굴과 선각처럼 보이는

몸체여서 더욱 그렇다. 마애불 앞에는 작은 석탑도  1기가 있다.

마애여래좌상은 강원도유형문화재74호다. 정자엔 숙종,영조, 정조의 어제시 현판이 정자에

어울리지 않게 크고 화려하다. 청허루에 있던 것을 옮겨오기 위해 세운 것이 요선정이다.

기둥이 짧아 정자가 아담하고 정겹다. 정자 왼쪽에 마애불, 오른쪽에도 큼직한 바위가 정자를

호위하듯 있다. 이 역시 땅 속으로 뿌리를 내리지 않은 뜬바위다.

 

마애불은 높이가 3,5미터, 석불에 비해 석탑은 아주 작다. 1,5미터 정도 될까 싶다.

정자와 바위와 소나무숲이 절묘한 조화를 이룬 요선정은 마애불과 석탑까지 갖춰

특이한 분위기를 풍긴다. 절벽 아래는 볍흥계곡에서 흘러온 계류가 합수돼 여기서 부터

주천강이 된다. []는 부를[呼也], 구할[求也], 맞이할[招也] 요다. []은 춤출 선

으로 나오는데 신선 선[]자와 같은 의미로 쓰인다. 선녀바위에 양사언이 요선암이라

각서를 해놨다고 하는데 글자를 보지는 못했다. 요선암에서 올려다 보면 기암절벽에

올라앉은 모습이 아름답다. 정자 주변도 빼어나고 정자에서 바라보는 풍광은 절경이다.

무릉[武陵]리라는 지명도 심상치 않다. 도원[桃園], 운학[雲鶴]리도 있다. 주천을 무릉도원의

고장으로 여겼을 조상님들의 생각이 지명으로 삼아 전해지는 것이리라.

 

사진을 통해 여러번 접하며 가장 오고 싶었던 곳이 요선정이었다. 마애불이나 석탑을

볼 때 옛날에는 암자가 있었던 자리였을 터다. 신라불교 전성기에 징효대사가 열반하며

1천개의 사리를 남겼다는 암자터 이야기도 있는데 여기였을 가능성도 있어보인다.

절벽노송 두 그루를 메모장에 각각 스케치, 떠나고 싶지 않은 곳이다. 법흥사도 가봐야 하니

어쩔 것이냐 아쉬움을 남긴 채 발걸음을 돌려야 했다. 마당에 주차를 해놨던 미륵암은

근래에 세워진 절로 터 하나는 참으로 명당지다. 명당지에 어울리는 건물이었으면 더

빛날텐데 하는 미흡함이 든다. 법당 앞 기둥에 걸린 주련 글씨가 행서 달필이어서 눈길을 끈다.

 

요선정을 나와 법흥사로 향했다. 계곡이 제법 넓고 마냥 깊다.

양쪽 계곡가에는 각양각색의 팬션들이 줄지어 들어서 있다. 맑은 계류가 유장하게 흐르기

때문일 것이다. 산고수장[山高水長]이란 표현이 적합한 산수경이다. 비단 법흥계곡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고 주천 어디를 가도 다 어울린다. 팬션들이 들어서고 각종 박물관들이

모여드는 것도 환경이 합당하다고 여겨서겠다. 훼손되지 않고 보존해온 자연만큼 귀한 보물이

또 어디 있을거냐.

 

사자산 법흥사! 수없이 들었던 소나무의 장관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며 감동에 빠져든다.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신 전국 5대 적멸보궁 중 하나인 법흥사지만 내겐 소나무의 보고로

더 인상지어져 있었다. 금강송의 웅자는 적멸보궁으로 올라가는 내내 눈길을 붙잡고 안놔줬다.

하늘빼았기라고 하던가 하늘따먹기라고 한단다. 부처님 계신 곳을 서로 먼저 가 닿으려고

끝없이 하늘을 향해 키를 키운다는 해석이 법흥사에 더 잘 어울린다.

국보612호인 징효대사보인탑비가 금강문을 들어서면 바로 보인다. 942년에 건립한 고비로는

파손이 거의 없는 완형이다. 법흥사로 개명한 것은 1902, 그 전에는 흥녕사, 흥녕선원으로

불렸다. 창건은 자장율사에 의했고 징효대사[826~900]는 선문을 중흥시킨 분이다.

 

오래된 절이지만 고건물은 눈에 띄지 않았다. 근래 중창불사한 건물들 뿐이어서 고풍을

찾을 수 없다. 고찰의 고색창연함은 느낄 수 없고 새 절이 주는 생경함만이 감돌아 안타깝게

만든다. 아직 현판도 달지 않은 대웅전에서 삼배를 올리고 적멸보궁에서 또 삼배, 내려오다가

제이보궁약사전에서 삼배를 올렸다. 약사전에서 앞에 보이는 구봉대산을 바라보면 능선이

와불로 보인다. 사자산 암벽도 부처님 모습으로 세 분이 있는데 착하지 않은 사람에겐

안 보인다고 한다. 적멱보궁이 있지만 진신사리는 사자산 암봉 깊이 어느 곳에 봉안되어

있단다. 전체 절터가 넉넉하고 편안하다. 거대한 금강송 숲도 어린아이처럼 품에 안고 있다.

가까이 가지 않으면 크게 보이지 않음도 그 때문이리라. 내가 여지것 전국을 다니며 본 중에

가장 늘씬한 큰 키의 금강송 솔밭이겠다. 키에 비하면 한아름은 훌쩍 넘지만 두아름 정도

굵기도 드믈다. 금강미인송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는 숲이다. 과연 화폭에 어떻게 표현해야

이 느낌이 날 것인가는 내게 주어진 숙제다.

 

일주문을 지나 절 앞 드넓은 주차장에 차를 댈 수 있어서 시간을 많이 벌었다.

전에는 일주문 밖에 주차를 하고 걸어 갔었단다. 신도들이 많지는 않았지만 꾸준히 있었다.

대웅전 뒷쪽 옆에는 돌 여의주가 있어 특이했다. 만져보니 햇볕에 달궈져 뜨겁다. 최근 것은 아니

란다. 보인탑비의 좌대인 거북이도 용머리 모양으로 여의주를 물고 있어 용과 얽힌 무엇이 있는

듯 하다. 다향원에서 오디즙을 마시며 피로를 풀었다. 우솔이 계류가 차다며 발을 담그자고 한다.

전에는 없었다는 일본식 축대가 양쪽으로 만들어져 있는데 개울돌을 옮겨서 쌓은지라 바닥은

볼품이 없어졌다. 여자분 서넛이 탁족을 하고 있었으나 흥이 깨져 탁족은 포기하고 돌아섰다.

 

폭염의 날씨여도 그리 덥게 느껴지지 않음은 무성한 숲이 내뿜는 신선한 기운 덕분이겠다.

벌써 오후 4, 우전이 6시 반에 춘천에서 모임이 있다. 곧장 출발하면 시간에 맞출 수 있으나

우솔을 태워다 주고 가려면 여유가 없다. 결국 우전이 모임 참석을 포기하며 우솔네 집을 들

렸고 모친과 아이들을 봤다. 집 가까이 있는 주천초교 운동장 가에 있는 소나무의 조형미가

빼어나 세장의 스케치를 했다. 우솔의 권유로 저녁까지 추어탕으로 해결하고 작별을 했다.

 

똑같은 행로를 밟아 춘천에 도착하니 9시였다.

돌아오는 길은 내내 바람이 여간 시원하지 않았다. 춘천시내로 들어오니 공기가 달랐다.

이번 행보에 감명을 받아 영월 쪽으로 발걸음을 간간히 해야겠다는 다짐이 들었다.

 

2011.   6.   22.

 

원문]  http://cafe.daum.net/knowhowup/Dnry/121


Posted by 아프로만 노하우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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